피에 살고 피에 죽는 한 사내가 있었다.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고 사는 그는 오로지 백성들 사이에서 붉은 피의 왕, 즉 '적왕' 으로만 불렸다.
그런 적왕의 앞에 눈처럼 희고 고운 여인이 나타났으니.
"이름이 예씨 집안의 가은이라고 했나."
그가 처음으로 여인의 이름을 외웠다. 오랜만에 여인을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늘 전쟁터에서 살던 악마같은 그가 이제 여인을 품어보려 했다.
그러나 여인이 그를 거부했다.
핏물로 무장된 그의 마음이 이제야 풀어지고 있었는데.
여인은 당차게도 그를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제게 살인마는 필요없습니다. 한결같이 저를 바라봐주고 아껴주시는 지아비가 필요할 뿐입니다."
적왕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살인마든 아니든 이미 내 궁에 들어왔으니 나의 여인이다. 그러니 많은 것은 바라지 마라. 죽기싫다면."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여인의 몸을 잡아 당겨 제 품에 안았다.
소름끼치듯 싫었지만 어느새 여인도 그에게서 나는 야릿한 피냄새에 마음이 끌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