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과
유성룡이 『징비록』을 남긴 이유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임란전록]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용인술로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한 유성룡과 병란에 앞서 부국강병을 강조한 이율곡을 만나야 할 시점이 무르익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 북방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남방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서로 나누어진 당쟁의 그늘은 조선사회를 약화시키고, 끝내는 조선 백성들을 병란의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일에는 반드시 전조가 따르기 마련이다. 임진왜란도 이탕개의 난에서 우리는 그 징조를 찾아볼 수 있다. 이탕개의 난을 통해 이율곡은 조선이 안고 있는 심각한 폐단을 절감하고는 선조에게 미래를 대비하는 정책들을 쏟아놓지만 그의 정책은 당파에 함몰되어 폐기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탕개의 난에 등장하는 신립, 이순신, 김시민과 같은 젊은 장수들과 휴정, 유정 등은 훗날 임진왜란에서 큰 몫을 담당하게 된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원한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한 인물이 유성룡이었고, 이는 파격적인 정책으로 가능하였다. 당시 병조판서로 이탕개의 난을 진압했던 이율곡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란전록』은 유성룡이 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이 어디에서 왔는지, 『징비록』을 쓴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역사소설로 그리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백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하게 되는 건 변함이 없다.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를 우리는 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임란전록은 이러한 물음에 강한 울림을 전해준다